오늘 밤도 문득 네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랑이고, 이제는 서로의 하루가 어떤 모습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더 이상 연락할 이유도, 다시 시작할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지금의 네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사랑하던 당시의 너와 나, 그리고 그때의 우리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꾼다.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고, 사랑 역시 기억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남는다. 지금 다시 만난다고 해서 그때의 우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안다. 그때의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니고, 그때의 나 역시 지금의 내가 아니니까.
그런데도 가끔은 그렇게 남겨진 시간들이 불쑥 찾아온다.
저녁 산책을 하다가 포도원 근처를 지나칠 때면 바람에 실려 오는 달큰한 포도 냄새가 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이유도 없이 네가 떠오른다. 향기 하나가 기억을 이렇게 선명하게 꺼내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네가 좋아하던 산을 오를 때도 그렇다.
숨이 조금 가빠질 즈음이면 예전처럼 네가 함께 걸어가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정상에 오르면 풍경보다 먼저 네가 했던 말들이 생각난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잠시 뒤로 흐르는 것 같다.
운전을 하다가 노래를 따라 부를 때도 문득 멈칫한다.
이 노래가 좋다며 이야기하던 너, 가사의 의미를 분석하던 너, 뽕끼가 아쉽다며 괜한 참견을 늘어놓던 너. 당시에는 시끄럽다고 웃어넘겼던 그 조잘거림이 이제는 기억 속 가장 선명한 소리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말한다.
어쩌면 맞는 말일 것이다.
예전처럼 아프지는 않다. 밤새도록 붙잡고 울지도 않는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괴롭지도 않다.
그런데 잊는다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 계절이 된다.
특정한 냄새가 날 때, 익숙한 노래가 들릴 때, 오래된 길을 걸을 때마다 그 계절은 잠시 돌아온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한동안 머물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래서 가끔 궁금해진다.
오늘 밤처럼 네가 그리운 건 아직 남아 있는 미련일까.
아니면 그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을 향한 그리움일까.
정답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시간들이 소중했다는 사실까지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가끔 네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시간들이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밤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너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사랑하던 계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믿어본다.
'윤성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만의 판도라의 상자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1) | 2026.04.12 |
|---|---|
| 인간관계 속 판도라의 상자. (2) | 2026.04.11 |
| 인간이 열어버린 최초의 금지, 판도라의 상자. (1) | 2026.04.10 |
| 새로운 인연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증거. (4) | 2026.04.02 |
| 만우절 거짓말. (2) | 2026.04.01 |